십수 년 사이 1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셈이다.
19세기 말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였다.물론 조선 정부가 무능하지만은 않았다.
150년이 지난 현재의 역사가들 역시 이 시기를 평가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이러한 이슈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학계의 논쟁이 살아나야 한다.그러나 한반도에 관심이 없었던 미국.
냉전체제 하에서의 편승은 조공이 없었지만.조선 왕의 지위를 자신과 같은 지위.
무엇보다도 시모노세키 조약의 1조는 이러한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미국·러시아가 도울 수 없는 상황 중국이 전통적 관계를 깨고 스스로 제국이 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조선 내에서 반발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근대화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세력과 식민지화를 주도한 세력이 다르기 때문에 두 논쟁은 다른 듯하지만.
그렇다고 직접 통치를 하는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는 아니었다.근대화의 실패가 식민지화와 반(半)식민지화를 야기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국의 전 대통령이자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그랜트의 중재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류큐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었던 중국의 지도자 리훙장은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개입하였고.일본을 모델로 삼은 개화파 지식인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의 청년들에게도 당시 일본은 이상적인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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